친구간의 장난스러운 우애를 다룬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는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어릴적 일화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격동기무렵인 선조시절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은 나라의 훌륭한 신하로써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런 오성 이항복의 후손들은 조선시대 말기 이조판서와 영의정을 배출한 명문가로써 그 권세를 전국에 떨쳤다고 하는데요. 당시 조선에서 세손가락에 들어갈 정도로 엄청난 경제력을 갖춘 집안이기도 했죠.

이 집안에는 6명의 형제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제국주의를 바탕으로 대륙진출의 야욕의 발톱을 드러내고 있는 일제의 침략에 독립운동에 동참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하는데요.

[명문가의 자제들로써 일제의 치하에서 생명을 연명한다는 것은 짐승과도 같은 것일 뿐이다]

라며 조국독립을 위해 그많은 집과 땅과 재물들을 모두 처분하고는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뜻을 피게 됩니다.


1920년 폐교되는 순간까지 총 3,500여명의 훌륭한 독립군을 배출하고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과 홍범도장군의 봉오동 전투에 참가했던 신흥무관학교는 바로 이 여섯형제들이 세운 학교입니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더라도 그 목적 달성을 위해 노력하다가 목숨을 잃는 것 또한 행복이다]

라는 우당 이회영 선생님과 그의 형제들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맏형인 이건영(1853~1940) 은 88세라는 고령의 나이에도 독립운동을 하셨고,

둘째 이석영(1855~1934)는 독립자금을 가장 많이 지원하셨고,

셋째 이철영(1863~1925)은 신흥무관학교의 교장직을 겸했으며

넷째 이회영(1867~1932)는 가난속에서도 독립을 외치다 중국의 뤼순감옥에서 일본의 고문을 겪으셨고,

다섯째 이시영(1869~1953)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직을 맡았으며, 신흥대학을 세우셨고 독립 이후 1948년 대한민구 최초정부의 부통령직을 담당하셨습니다.

여섯째 이호영(1875~1933)은 다물단 단원으로 밀정들을 처단하는 활동을 하다 베이징에서 실종되셨습니다.

이시영선생님을 포함한 여섯 명의 형제들은 일제시대에서도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는 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국독립을 위하여 험난한 길을 선택하여 고귀한 희생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선조들의 헌신과 투쟁의 역사가 있었기에 오늘 날 우리가 당당한 나라를 가지고 평화롭게 살수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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